영암의 금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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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의 금석문 미암면

절충장군 조석침 묘비

주  소
미암면 춘동리 산 3-10
건립연대
숭정기원후 4 을축 3월(1865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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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조선 절충장군 첨지 중추부사 조석침의 묘

증 숙부인 나주임씨의 묘, 공묘칠무하부우(公墓七武下附右)
증 숙부인 경주최씨의 묘, 공묘칠무하부좌(公墓七武下附左)
그러므로 뜻이 정결하고 행실이 도타우며, 산림에서 봉양함이 높으며,
사우가 중망을 맡겨도 몸가짐이 세상에 은밀하고, 윤택함을 드러나게
하는 자가 바로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조석침 공이다. 공은 자가 백옥으로,
숭정 을묘년 1월 11일생이다. 모친이 꿈에 성인이 집에 이르는 것을 보고
기이하게 여겼으므로, 어렸을 때의 자가 성린(聖隣)이다. 다만 말을 배웠을
뿐인데도 문자를 해석할 줄 알았고, 7~8세에는 문장을 지을 줄 알았으며,
자라서 학문을 하게 된 뒤에는 번잡한 교육을 받지 않아도 경사(經史)에 다
통달했다.
기사년, 우암(尤庵) 송 선생이 후명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인 처사공이 흐느껴
울었는데 공의 나이 15세로 곁에 있으면서 비탄에 젖어 말하기를 “우리 도가 그런 것인가?
대현이 돌아가셨구나!”라고 하였다. 그가 현인(賢人)을 따르고 덕을 숭상하는 것은 천성에
근거하였으므로 이와 같았다. 공은 이미 가정에서 수학하면서 성리(性理)에 대한 학설을
거듭 들었으나, 향상하는 공부에 뜻을 두었으며, 문중을 위하여 과거 공부는 비록 폐하지
않고 있으면서 항상 공업에 방해되고 뜻을 빼앗는 것에 대하여 경계하였다.
무인년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제도를 준수하는 것이 예와 같았으나, 후에 연이어 향시가
있었으므로 시험에 불리할 것이라고 여겼다. 처사공이 공부하다 병들어 세월을 보낸 것이
수십 년이었다. 공과 여러 동생이 부지하고 지켰으니 성심과 효가 갖추어짐이 지극하였다.
그러나 상을 당하자 물과 음식을 입에 대지 않은 채로 상복도 제대로 벗지 못한 채
통곡하다 몸을 상했다.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나자 말하기를 “세상의 변화가 이와
같으니 어찌 조정에 나아갈 계획을 할 수 있으랴?”고 하였다.
이때부터 문을 걸어 잠그고 문 앞의 길도 쓸지 않은 채 오직 글을 읽고 강학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계묘년에 지촌(芝村) 이 문절공(李文節公)과 첨암(尖岩) 정 문경공(鄭文
敬公)이 함께 유배를 떠나오던 길에 근처에서 심부름꾼을 보내었는데, 공이 모두 가서
절하고 스승의 예로 모셨다. 서호(西湖)에서 만나기도 하였고, 남양에 배 띄워 만나기도
하였는데, 모두 기대하며 만나 늘 함께 학문을 논하였으니, 노사숙유(老師宿儒)들이
칭찬하였다. 문정공(文正公) 이재(李縡), 상국(相國) 유척기(兪拓基)는 모두 보지 못하고
글만 보내었는데,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함을 한스러워하였다.
외숙인 창암(蒼岩) 송원석(宋元錫)이 그 안에 이르렀을 때 세상이 기용하게 되지 않음을
매우 애석해하였고, 상서(尙書) 송상기(宋相琦)는 일찍이 한번 보고 문득 남보다 더
인정받고 칭송을 받았다. 공은 평소에 말이 없고 기쁘고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동정이 일관되었다.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빗질하면 의관을 정제하고, 가묘에 들어가
배알 하였고, 물러 나와 단정히 앉아 기운과 체모를 화순하게 하여 마치 깊은 병이 아닌
것처럼 하였으니, 곧 일찍이 곁에 쓰러져 누워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성품이 청렴하고 담박하면서 간결하여 외물에 그 마음을 들이지 않았고, 가난을 부족함이
없다고 여기고 분수를 지켰으며, 처사를 온화하게 하였다. 평상 머리에 매화 화분 2기를
두었고, 물고기 수십 마리를 기르면서, 가만히 자연의 조화를 관찰하고, 스스로 발 구르고
춤추게 한다는 구절대로 하였다. 오직 정자, 주자의 글과 《심경》, 《근사록》 따위의 글을
살펴보았으며, 펼쳐보고 입으로 외우기를 조석으로 그치지 않았다. 형제에게 우애로
행동하기를 매우 독실히 하였고, 제자를 가르침은 엄정하게 하였으며, 남을 대접하는 것은
모나지 않게 하였고, 혼연히 속으로 머금었다. 집에 있을 때의 의절이나 상례, 제례 때의
절차 및 예문들은 한결같이 《소학》과 《가례》를 따라 실천하였으니, 향촌의 평이 사라지지
않아 여러 번 추천을 받아 전조에서 침랑이나 감역에 주의를 기울이기도 하였으나 매양
낙점을 받지 못했으니 또한 운명이었다.
조정에 별도로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이 있어서 병자년에 첨지중추부사로 승차하였다.
항상 진실함을 실천하고, 절실한 것에 힘썼으며, 말이 뚜렷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그 도량의 넓이를 볼 기회가 드물었다. 일찍이 편액하기를 움집을 묵졸(黙拙)
이라 하고, 당을 무언(無言)이라고 하였다. 시문을 지어도 단지 의미만 통하게 할 뿐,
번잡하게 수식하기를 일삼지 않았다.
상서(尙書) 이태중(李台重)이 그의 격조를 최고로 쳤으니, 지금 세상에 글 짓는 자가
미칠 바가 아니라고 하였다. 이웃집 노파들이 품평한 것 몇 권이 집안에 보관되어 있다.
임오년 2월 16일에 졸하니 향년 88세이다. 원군의 사우들이 모두 애석해하며 말하기를 “
사림 가운데 우러러볼 사람이 없으니, 남녘 땅의 불행이로다.” 사람이 모두 기꺼이 복을
입었으니, 그 대략을 볼 수 있다. 한천동(寒泉洞) 부임(負壬)의 자리에 장사지냈다.
조씨는 창녕을 본관으로 하니 시조인 계룡(繼龍)은 신라 때 창성부원군으로 봉해졌고,
고려 때에는 8대에 걸쳐 평장사를 내고, 5대에 걸쳐 소감을 냈으며, 2대에 걸쳐 의정을
냈다. 본조에 이르러서는 대표적으로 현달한 사람이 부제학을 지낸 충정공 상치(尙治),
정국공신으로 판서를 지낸 창산군 계은을 최고로 여긴다. 2대를 지나 도사 기서(猉瑞)
의 대에 이르러서는 우계(牛溪) 선생을 사사하여 사우들의 중망을 많이 받았으니, 이분이
공의 고조가 된다. 증조는 휘가 행립(行立)으로 여러 번 군읍의 수령 노릇을 하였고, 후에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갑병(甲丙) 두 난리를 겪자 두 번 창의하여 일직 사계(沙溪)의
문하로 가서 있었으니, 향인들이 모두 그리워하며 사당을 세워 제향하였다.
조부는 사복시정(司僕寺正) 휘 경보(敬輔)로 다섯 자식이 있었는데, 그중 두 번째가
처사공 일주이다. 처사공은 성동 시절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고, 나이 18세에 우암 선생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니, 선생이 그 나이에 학문에 뜻을 둔 것을 아꼈고, 그 종형인 야은(野
隱) 공의 손녀를 처로 삼게 하였다. 이분이 공의 부친과 모친이다. 배위는 나주임씨 회(薈)
의 따님이다.
그 종조부는 부제학 영(泳)이다. 시집온 지 3년 만인 무인년에 세상을 떴다. 후처는 경주
최씨이니, 간관을 지낸 형한(亨漢)의 후예이다. 성품과 행동이 맑고 밝아서 시부모를 잘
받들었고, 제사를 잘 모셨으며, 부인의 덕을 어긴 적이 없었으나 계해년, 공보다 20년
먼저 세상을 떴다. 전, 후의 배위는 모두 한천에 합장하여 공과 같은 공간에 광을 달리하여
장사지냈다. 세 아들을 두었으니 윤수(潤洙), 윤사(潤泗), 윤락(潤洛)으로, 윤락은 중부의
양자로 갔으며, 윤수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광의(光檥), 광익(光杙)이다. 윤사에게는 세
아들이 있으니, 광즙(光楫), 광정(光楨), 광설(光枻)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많으므로
다 적지 않는다. 공은 80이 지나고 나서 총명함이 진전되지는 않았으나 방책(方冊)을
공경히 대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공부하였으며 늙어서도 게으르지 않았으니, 어찌 시간에
맞추어 교화된 사람이 있음이 아니겠는가? 그 행동을 보고 또 부친이 그를 기른 것을 보면
그야말로 명문을 짓기에 옳을 뿐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우주의 사이에 위임할 수 있는 것은 형상이로다.
마음이 넉넉하고 기가 컸으니 외물이 저절로 물러가네.
오직 지위는 가득하지 않았으나 명하면 바로 들었다.
참을 보존하여 학문에 힘썼으니 나의 덕을 온전하게 해주었도다.
늙어서도 기름을 충실히 하니 그 전형(典型)을 도리어 생각하게 되는도다.
달이 험한 언덕 위로 떠 오르고 호수는 어두운데 여기서 점을 치니 큰 사람이 평안할
것이로다.
공을 알고자 한다면 이 명문을 거울삼아 참고할 지어다.
숭정(崇禎)기원 후 4 을축(乙丑) 3월 일, 자헌대부 행 사헌부대사헌 겸 지의금부사 성균관
제주경연관 은진(恩津) 송래희(宋來熙) 기술

有明朝鮮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曺錫琛之墓
贈 淑夫人羅州林氏之墓 公墓七武下附右
贈 淑夫人慶州崔氏之墓 公墓七武下附左
故有志潔行篤養高林泉而師友推重身世隱潜而令閏表著者曰卽僉樞曺公
諱錫琛字伯玉也公以
崇禎乙卯正月十一日生母夫人夢聖人至家異之命小字以聖隣纔學語便解
文字七八歲能屬文稍
長就學不煩敎督奄通經史己巳聞尤庵宋先生受 後命大人處士公爲位而
哭公年十五在傍悲嘆
曰吾道非耶大賢亡矣其尊賢尙德根於天性如此公旣受學於家庭習聞性理
之說留意向上之工而
爲門戶計雖不廢擧業而常以妨工奪志爲戒戊寅遭內艱守制如禮後連捷鄕
解以不利南省處士公
攻學致疾沉淹數十年公與諸弟其所以扶持將護誠孝備至及喪水醬不入口
不脫襄經號哭毀戚及
辛壬士禍乃曰世變如此何可爲進取之計哉自是杜門却掃惟以讀書講學爲
業癸卯芝村李文節公
尖岩鄭文敬公同被行讉子近境公皆徃拜師事之或借寓西湖或挐舟南洋并
蒙期待每與論學詡之
以老師宿儒李文正公縡兪相國拓基皆不面而書恨未一面至其內舅宋蒼岩
元錫深惜其不爲世用
宋尙書相琦甞一見而輒稱許於人公平居沈黙喜怒不形動止有常晨起盥櫛
衣冠展拜家廟退而端
坐氣貌和粹如非甚疾則未甞欹側偃卧性廉淡簡約外物無所八其心安貧守
分處之怡如床頭置梅
栢二盆養魚數十頭有黙觀化工妙自令舞蹈人之句惟以案上程朱心近等書
手閱口誦早夜不撤友
兄弟甚篤敎諸子嚴正待人接物不露圭角而渾然含容居家儀度喪祭節文一
遵小學家禮而行之鄕
評不泯屢登繡薦銓家注擬於寢郎監役而每不克蒙点亦命也因 朝家別有
優老之典丙于陞僉知
中樞府事常以踐履眞切爲務不喜立言著論故人罕窺其涯際甞扁其窩曰黙
拙堂曰無言或爲詩文
只要辭達不事雕餙李尙書台重以爲格調最高非今世操觚者所及云有隣嫗
評品幾卷藏于家卒於
壬午二月十六日享年八十八遠近士友莫不嗟惜曰士林無仰南土不幸人之
悅服槩可見矣葬于寒
泉洞負壬之原曺氏籍昌寧始祖諱繼龍在羅封昌城府院君至麗八世平章五
世小監兩世議政及于
本 朝代有顯人副提學忠貞公諱尙治靖國功臣判書昌山君諱繼殷爲最歷
二世至都事諱猉瑞師
牛溪先生士友多推重是爲公高祖也曾祖諱行立屢典郡邑秩至僉樞甲丙兩
亂再度倡義早遊沙溪
先生門鄕人慕之立祠爼豆祖司僕寺正諱敬輔有子五人茅二曰處士諱一周
自成童有志爲學十八
請業于尤庵先生之門先生愛其年妙志學以其從兄野隱公之孫女妻之寔爲
公之考與妣也配羅州
林氏薈之女其從祖副提學泳也旣掃三年而沒於戊寅繼配慶州崔氏久嶶安
諫臣亨漢之后也性行
淑哲事尊章奉蒸甞無違婦德先公二十年沒於癸亥前後配俱葬于寒泉與公
同原異壙三男潤洙潤
泗潤洛出后於仲父潤洙二男光檥光杙潤泗三男光楫光楨光枻曾玄以下多
不盡錄公年旣大耋聰
明不襄敬對方冊好學之工老而無倦豈其不與歲俱化者存歟觀其所與又考
其所養是可銘也己銘曰
宇宙之間所委者形心怡氣泰物絫自屛惟位不滿命之是聽葆眞劬學全吾德
馨大耋充養猶想典型
月出嵂崒湖水杳冥卜玆玄蘆碩人攸寧有欲知公鏡考斯銘
崇禎紀元後四乙丑三月日資憲大夫行司憲府大司憲兼知義禁府事成均館
祭酒經筵官恩津宋來熙述

유명조선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조석침지묘
증 숙부인나주임씨지묘 공묘칠무하부우
증 숙부인경주최씨지묘 공묘칠무하부좌
고유지결행독양고임천이사우추중신세은잠이령윤표저자왈즉첨추조공
휘석침자백옥야공이
숭정을묘정월십일일생모부인몽성인지가이지명소자이성인재학어편해
문자칠팔세능속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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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률줄호수묘명복자현노석인유녕유욕지공경고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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