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금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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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의 금석문 학산면

소포공 오경리 신도비

주  소
학산면 은곡리 117-2
건립연대
경신 3월(1920년) *오경리 : 1813~189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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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선대부 공조참판 해주오공 신도비명

유명조선국 가선대부 행 공조참판 겸 동의금부사 춘추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통훈대부
사간원 헌납 해주오씨 신도비명 병서
통훈대부 전 현릉참봉 월성 최영조(崔永祚)가 짓고, 성산 현재승이 쓰고, 자헌대부 행
종경원(從卿院) 정(正) 완산 이재량(李載亮)이 비액(碑額)의 전서를 썼다.
선황제 즉위 10년 계유년, 우리 아버님이 동부승지(同副承旨)로 계실 때 소를 올려 시폐
(時弊)에 대해 진언하였는데 말이 매우 얌전하면서도 강직하였으니, 임금께서 깊이
치하하고 받아들였다. 이에 뭇 권간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교대로 소장을 올리며 주살(誅
殺)할 것을 청하자, 임금이 그 가운데 심한 것이 옥당(玉堂)의 권정호(權鼎鎬)였다. 다른
날 경연석에서 사나운 기색으로 목소리를 높이고 소리치며 위협하여 신하의 예를 다시
차리지 않았다. 사관(史官) 백규섭(白圭燮)이 기록한 연설에 그 흉언에 더 말을 보태고
사적으로 윤색하였다. 이때 소포(素圃) 오공(吳公)이 계셨는데 전임 사간(司諫)으로
의연히 바른말을 지키고 강팍하고 사나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계를 올려 권정호의
흉한 상소를 조목조목 지적하여 말하였고, 백규섭이 경연에서의 일을 윤색한 일을
지적하여 말하였다. 그러자 그 말을 듣고 오공을 굳세다고 하였다.
그날로부터 얼마나 지났는지 만사가 다 변하여 공의 무덤 주변은 나무로 뒤덮였다.
공의 봉사손(奉祀孫)인 홍선(弘善)이 이때 막 신도비(神道碑)을 세우려고 하여, 대인이
지은 글로 하려 한다고 하며 두루 알지도 못하고 접하지도 않은 나에게 문장을 청하므로
한결같이 사양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경리(慶履)이고 ,
자는 중화(仲和)이며, 소포(素圃)는 호이다. 오씨는 해주(海州)를 관향으로 하여 나온
성씨로 광록대부(光祿大夫) 문하성사(門下省事)를 지낸 종인(宗仁) 공의 후예이다.
대대로 고귀한 신분을 세습하여 고관대작을 배출하였고, 고려 왕조 때도 공업(功業)이
크게 드러났다. 우리 왕조에 들어서는 휘 경남(慶男) 공이 있으니 ,관직은 지평(持平)에
이르렀고, 공의 8대조가 된다. 고조부의 휘는 대유(大裕)로 문장과 행실로 이름이 있었다.
증조부는 휘가 시우(時佑)이고, 사복시(司僕寺) 정(正)에 증직되었다. 조부는 휘가 기철(琪
喆)이니, 이조참의(吏曹叅議)에 증직되었다. 부친은 휘가 재익(在翼)으로 이조참판(吏曹叅
判)에 증직되었다. 이처럼 3대에 걸쳐 세상을 뜬 뒤에 증직되어 영달이 넘치게 된 것은 공
때문이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된 함양박씨 박정채(朴挺采)의 따님으로 여사(
女士)의 행실이 있었다.
부인이 아이를 잉태하였을 때 공이 기이한 꿈을 꾸었다. 순조(純祖)[仁陵] 계유년 9월
28일, 영암군 서은곡리(西隱谷里) 집에서 소포공을 낳았다. 소포공은 골격이 깨끗하고
빼어났으며, 성음(聲音)이 바르고 뚜렷하였다. 어려서 놀 때마다 손으로 글자 모양을
그렸는데 보는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점점 장성하게 되자, 학문하는 것이 번거로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았고, 필법(
筆法)도 굳건하게 되어 일가를 이루었다. 역사를 읽을 때 옛사람의 충효(忠孝)가 사법(師
法)으로 삼을 만하게 기술된 부분에 이르면 언제나 세 번 반복하여 완미하였다. 경학(經
學)에 더욱 조예가 깊어 천인성명(天人性命)의 심오함과 이기(理氣), 수졸(帥卒)의 분류에
대하여 모두 말없이 깊이 통찰하여 옛사람이 미처 명확하게 하지 못한 부분을 명확하게
하였다. 대개 식견이 높고도 심원하였으며 조예가 정밀하고 깊어서 이미 세상의 유자라는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겼으며, 봉양함에 어버이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고, 형제와 우애 있게
지냈으며, 내외의 친척과 화목하였다. 제사를 지낼 때는 재계하기를 반드시 제사를 받는
사람이 살아 있는 것과 같이 정성을 들였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가묘(家廟)에 배알하고
물러나와 엄숙히 앉아서 경전을 펼쳐보았다. 노복을 부릴 때는 한번도 매질하며 꾸짖은
적이 없었고, 은혜와 위엄을 병행하였다. 가정에서는 본디 청빈하게 지냈으나 혹시 기근을
구제할 때는 성심을 다해 구휼하였으며, 향리의 친족이 모두 공에게 의탁하였다. 항상
자식과 조카를 가르칠 때는 글을 읽고 함부로 단계를 넘어서는 일이 없도록 경계하였고,
몸을 다스릴 때는 모름지기 근검(勤儉)을 요체로 하도록 하였다. 집안에 기거할 때의
행동과 의리는 모두 고인에게 부끄럽지 않게 함이 또한 이와 같았다.
헌종 기유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 성균관(成均館) 전적(典
籍), 이조정랑(吏曹正郎),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역임했다. 무오년에 봉화현감
(奉化縣監)으로 나아가 선비들에게 학문을 권장하여 향촌의 풍속이 아름답게 변했고,
폐단을 혁파하고 제거하니 온 경내가 안정되었다. 임기가 끝나 돌아갈 때는 행장을 조촐히
하였다. 신유년에 사간원(司諫院) 헌납에 제수되었으나, 이때 모친상을 당했다. 바삐
행로를 재촉하느라 시탕하지 못했는데, 이것을 종신토록 지극 한으로 여겼으며, 피눈물로
3년 상을 치르니 몸이 몹시 야위었다.
병인년에 장령으로 있으면서 부친상을 당했다. 부친을 부여잡고 울부짖고 몸부림치며
슬퍼하다가 기절하여 겨우 소생하였다. 상례를 치르는 예절은 한결같이 예제를 따랐으며,
삭망(朔望)에 무덤을 살피고, 깨끗하게 하는 것을 추위나 더위에도 빼먹지 않았다. 묘
앞에 무릎 꿇고 앉는 곳에 있을 때는 항상 꿇어앉은 흔적이 남았다. 상복을 벗자 다시는
세상일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자연을 굳게 지키며 늙어 죽을 계획을 세웠다. 나중에
동료들이 다시 일어나도록 권하였으므로 겨우 나아가 벼슬살이를 이어갔다. 경오년에
사헌부 집의(執義)에 제수되었고, 임신년에는 사간원 사간에 제수되었다.
임오년에 통정대부로 승차하고, 돈녕부(敦寧府) 도정(都正)이 되었다. 6월 군병이 소요를
일으키자 도성이 어수선하여 사람들이 모두 새가 흩어지듯 흩어졌으나 공은 조금도
마음이 동요하지 않았다. 누군가 말하기를 “아마 떠나야겠지요?”라고 하자 공이 말했다.
“만약 나가서도 화를 입게 된다면 어찌 앉아서 일을 기다릴 것인가? 세상이 어지러움을
당했는데도 구차히 면하고자 하면 남아 있는 친족들은 후에 기상이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난이 끝나자 상소를 올려 고향으로 돌아갔다. 계미년에 1자급을 더하여
특진하였으니,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참판(工曹叅判)에 제수되었다. 계사년 7월 11
일 술시에 정침에서 세상을 뜨니 81세였다. 은곡(隱谷) 청룡고개 사좌(巳坐)에 장사를
지냈다.
공은 조정에서 있던 40여 년 동안 권세와 이익으로 청탁하여 권세에 가까이 다가가려
한 적이 없었고, 관직에 있으면서 직분을 지켰으며, 예의와 염치의 범위를 넘어선 적이
없었다. 그리고 계유년에 올린 한 통의 상소는 그가 나라를 염려하여 고심하며 악을
질병처럼 여기고 심지를 굳건히 한 것을 알 수 있으니, 이른바 산 동쪽에서 우는 봉황이나
가을 하늘의 새매라고 하는 것이니 얼마나 위대한가!
배위는 정부인 김해김씨로 그 부친은 재묵(載黙)이다. 1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현빈(顯
彬)이며, 문화류씨 류석립(柳錫立), 해주최씨 최원순(崔源淳), 풍양조씨 조동진(趙東振)을
사위로 두었다. 두 번째 부인은 광산김씨 김포석(金甫錫)의 따님이다.
두 아들을 두었으니 현구(顯九), 현일(顯一)이며, 세 딸은 낭주의 최노식(崔魯植), 창녕의
조영환(曺榮煥), 금성의 김기종(金基鍾)에게 시집갔다. 장남 현빈의 아들은 홍선(弘善),
장선(章善) 형제이다. 장선의 아들은 관영(寬泳), 화영(華泳)이다. 현구(顯九)는 상선(相
善), 방선(邦善), 은선(殷善) 등의 아들을 두었고, 관영(寬泳)은 아들이 학근(學根), 성근(成
根)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호남의 이름 난 사람은 소포 오공이라네.
하나의 신념 외에 다른 것이 없고, 도량이 넓고 아름다워 포용력이 있었다.
양사의 관직을 역임하고, 왕실을 위해 성실히 일하였으며,
간흉을 배척할 때는 가을 하늘의 새매처럼 의기 있게 말하였다.
소잡는 칼 슬쩍 시험해 보듯 지방을 다니되, 가는 곳마다 따뜻한 봄인 양 선정을 펼쳤네.
순풍의 기러기처럼 성스러운 주상과 어진 신하였으니,
지위는 아경(亞卿)에 이르렀고, 수명은 팔순을 넘겼더라.
족함을 알고 편안히 은퇴하여, 한 세대의 완전한 사람이 되었도다.
화락한 군자여 즐거운 마음으로 세상을 떠났네.
자식은 효성스럽고, 손자들은 창성하여 능히 가풍을 이엇도다.
은곡의 무덤가 가는 길, 우뚝한 저 비석 있노라.
천박한 내가 명을 지었지만 그 말은 아첨이 아니로세.
경신(庚申) 3월 일

嘉善大夫工曹參判海州吳公神道碑銘
有明朝鮮國嘉善大夫行工曹叅判兼同義禁府事春秋館事五衛都摠府副摠
管通訓大
夫司諫院獻納海州吳公神道碑銘并序
通訓大夫顯陵前叅奉月城崔永祚撰
星山玄在升書
資憲大夫行彷卿院正完山李載亮篆
先帝御極之十年癸酉我先君子以同副承旨疏陳時弊言甚幼直 上深加嘉
納於是群
奸蜂起交章請誅而君其甚者玉堂權鼎鎬也至食 筵席暴色厲聲咆哮威脅
無復人臣
禮史官白圭燮記筵說酬其凶言私自粧撰時則有素圃吳公以前司諫毅然守
正不畏彊
禦啓斥鼎鎬之凶狀道節以及圭燮變換筵說之罪聞者壯之曾日月之幾何萬
事滄桑而
公之墓木己拱矣主鬯孫弘善方營神道之刻以其大人所撰狀請文於不傍不
接固辭不
獲命謹按公諱慶履字仲和素圃號也吳氏系出海州光祿大夫門下省事宗仁
之後也世
襲冠冕卿相勳業大顯于麗入我 朝有諱慶男官持平於公爲八世高祖諱大
裕有文行
曾祖諱時佑 贈司僕正祖諱琪喆 贈吏曹叅議考諱在翼 贈吏曹叅判三世
追榮涾
以公故妣 贈貞夫人咸陽朴氏挺采女有女士行及其娠公有夢罷之異以
仁陵癸酉九月二十八日生公于靈巖郡西隱谷里第骨格淸秀聲音雅亮自幼
遊戱每手
畫字樣見者異之稍長自知爲學不煩提飭筆法亦遒健成家讀史至古人忠孝
足爲師法
處未嘗不三復玩味尤邃於經學天人性命之奥理氣帥卒之分無不黙契深透
發前人之
所未發盖其識趣之高遠造詣之精深己非俗儒之所能及也孝事父母養志無
違友于昆
季睦子宗族祭祀齊戒必致如在之誠每日晨起拜謁家廟退而危坐披閱經傳
御奴僕一
無箠楚呵責而恩威并行家素淸貧而或値飢荒誠心救恤鄕里宗黨咸得依頼
常敎子侄
讀書戒無涉獵治身須要勤儉其居家行義之無愧古人也又如此
憲宗己酉登文科歷承文正字成均館典籍吏曹正郎司憲府持平戊午出監奉
化縣卷士
興學鄕風丕變革弊祛瘼一境安堵秩滿而歸行李蕭然辛酉拜司諫院獻納是
年漕內艱
爲戴星之行以未得侍湯爲終身至恨泣血三年柴毁骨立丙寅以掌令丁外憂
攀號擗踊
頓絶方蘇送終之節一遵禮制朔望省掃不以寒暑闕焉墓前當膝處常有跽痕
制闋無復
世念固守林樊爲終老計後因儕友之勸起黽勉就仕庚午拜司憲府執義壬申
拜司諫院
司諫壬午陞通政爲敦寧府都正値六月軍擾都城波蕩人皆雉鳥散公畧無動
念或曰盖
去諸公曰如其出而遇禍曷若坐而待事其視世之臨難苟免遺親後石者氣象
果何如也
亂己上疏還鄕癸未特加一資授嘉善大夫工曹叅判以癸巳七月十一日戌時
考終于寢
壽八十一葬隱谷靑龍嶝巳坐原公立朝四十餘年未嘗以勢利于謁爲跡權門
居官守職
不踰禮義廉耻之大閒而癸酉一疏可見其憂國苦心疾惡剛膓負所謂朝陽之
鳳秋天之
鶚也何其偉耶配貞夫人金海金氏考載黙擧一男三女男顯彬文化柳錫立海
州崔源淳
豊壤趙東振壻也再娶光山金甫錫女二男顯九顯一□□三女適朗州崔魯植
昌寧曺榮
煥錦城金基鍾顯彬男卽弘善次章善弘善男寬泳華泳顯九男相善邦善殷善
寬泳男學
根成根銘曰 湖南名碩素圃吳公斷斷無他休休有容歷敭兩司勤勞王室攘
斥奸凶秋
天鶚舌薄試牛刀有脚陽春順風鴻毛聖主賢臣位躋亞卿壽踰八旬知足恬退
一代完人
豈弟君子寬樂令終子孝孫昌克紹家風隱谷之阡有屹龜趺賤子述銘其言非

庚申三月 日

가선대부공조참판해주오공신도비명
유명조선국가선대부행공조참판겸동의금
부사춘추관사오위도총부부총관통훈대
부사간원헌납해주오공신도비명병서
통훈대부현릉전참봉월성최영조찬
성산현재승서
자헌대부행방경원정완산이재량전
선제어극지십년계유아선군자이동부승지
소진시폐언심유직 상심가가납어시군
간봉기교장청주이군기심자옥당권정호야
지식 연석폭색려성포효위협무복인신
예사관백규섭기연열수기흉언사자장찬시
칙유소포오공이전사간의연수정불외강
어계척정호지흉상도절이급규섭변환연열
지죄문자장지증일월지기하만사창상이
공지묘목기공의주창손홍선방영신도지각
이기대인소찬상청문어불방부접고사불
획명근안공휘경이자중화소포호야오씨계
출해주광록대부문하성사종인지후야세
습관면경상훈업대현우려입아 조유휘경
남관지평어공위팔세고조휘대유유문행
증조휘시우 증사복정조휘기철 증이조
참의고휘재익 증이조참판삼세추영답
이공고비 증정부인함양박씨정채녀유녀
사행급기신공유몽파지이이
인릉계유구월이십팔일생공우영암군서은
곡리제골격청수성음아량자유유희매수
화자양견자이지초장자지위학불번제칙필
법역주건성가독사지고인충효족위사법
처미상불삼복완미우수어경학천인성명지
오리기수졸지분무불묵계심투발전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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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배알가묘퇴이위좌피열경전어노복일
무추초가책이은위병행가소청빈이혹치기
황성심구휼향리종당함득의뢰상교자질
독서계무섭렵치신수요근검기거가행의
지무괴고인야우여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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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랑사헌부지평무오출감봉화현권사
흥학향풍비변혁폐거막일경안도질만이귀
행이소연신유배사간원헌납시년조내간
위대성지행이미득시탕위종신지한읍혈삼
년시훼골립병인이장령정외우반호벽용
돈절방소송종지절일준례제삭망성소불이
한서궐언묘전당슬처상유기흔제결무복
세념고수임번위종노계후인제우지권기민
면취사경오배사헌부집의임신배사간원
사간임오승통정위돈녕부도정치육월군요
도성파탕인개치조산공략무동념혹왈개
거제공왈여기출이우화갈약좌이대사기시
세지임난구면유친후석자기상과하여야
란기상소환향계미특가일자수가선대부공
조참판이계사칠월십일일술시고종우침
수팔십일장은곡청룡등사좌원공립조사십
여년미상이세이우알위적권문거관수직
불유례의염치지대한이계유일소가견기우
국고심질악강장부소위조양지봉추천지
악야하기위야배정부인김해김씨고재묵거
일남삼녀남현빈문화류석립해주최원순
풍양조동진서야재취광산김보석녀이남현
구현일□□삼여적낭주최노식창녕조영
환금성김기종현빈남즉홍선차장선홍선남
관영화영현구남상선방선은선관영남학
근성근명왈 호남명석소포오공단단무타휴
휴유용역양양사근노왕실양척간신흉추
천악설박시우도유각양춘순풍홍모성주현
신위제아경수유팔순지족념퇴일대완인
개제군자관락령종자효손창극소가풍은곡
지천유흘구부천자술명기언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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